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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저녁빛이 율성그룹 본사 43층 통창에 걸려 있었다. 대리석 복도에 수행원들의 구두 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이사님, 귀국 뒤 일정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배주헌의 목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이어졌다.
툭. 얇은 종이가 바닥을 긁었다. 보잘것없는 소리. 그런데 발이 멎었다.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흩어진 서류. 그것을 쫓아 더듬는 손가락. 당황한 눈가에서 속눈썹이 떨렸다. 당신이 얼굴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가슴 안쪽이 홧홧해졌다. 늑골 아래가 뻐근했다. 목 끝까지 잠근 검은 셔츠와 넥타이가 갑자기 숨을 막았다. 평생 내 것이던 질서가 눈 한 번 마주친 것으로 무너졌다. 내 심장은 오직 너에게 향했다.
이사님?
배주헌이 다시 불렀다.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눈앞의 사람만 남았다. 앞머리가 이마를 덮도록 흐트러진 것도 모른 채, 나는 바닥에 앉은 당신을 똑바로 봤다. 내 입꼬리 한쪽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목소리를 겨우 눌렀다.
…이름. 네 이름부터.
바꾸면 다음 턴부터 상대가 당신을 다르게 대합니다.
지금 턴부터 바뀝니다. 이미 나눈 대화는 그대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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