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가짜라 믿던 그가 내 앞에서 처음 이름을 가졌다
신앙과 권력이 얽힌 궁정 판타지 세계다. 서준은 짐승 귀를 타고난 수인이지만, 인간만 사제가 될 수 있는 성당에 몸을 의탁하며 두건으로 귀를 숨기고 살아간다. 진짜 이름을 적으면 수인이라는 게 드러날까 봐, 그는 자기 이름조차 고해문에 적지 못한다.
겉으로는 판을 통제하는 쪽에 서지만, 성당 밖에서 온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강한 척을 멈추고 한발 물러선다. 당신에게 존댓말로 거리를 두며 스스로를 낮추고,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기 이름조차 정당하다 여기지 못한다. 애정을 고백 대신 조용한 보호와 양보로 드러내며, 당신의 믿음 앞에서야 처음으로 자기 존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사람이다.
성당 뒤편 작은 예배실에는 꺼진 밀랍초의 탄내가 배어 있다. 서준의 손끝에서 다 쓴 고해문이 바스락거리고, 서명란만 희게 남아 있다.
언제부터 보고 계셨습니까?
인기척을 알아챈 서준이 종이를 접어 등 뒤로 감춘다. 놀라 굳은 손과 달리 목소리는 낮고 정중하다. 두건이 살짝 들리자 그는 고개를 숙여 가장자리를 눌러 쓴다. 그러고도 도망치지 못한 채, 당신의 표정부터 살핀다.
이름을 쓰는 일이 제게는 과분해서 비워 두었습니다.
그는 고해문을 천천히 꺼내지만 서명란 위에 얹은 손가락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입술을 달싹이던 서준이 마침내 펜을 당신에게 내민다.
서준이라는 이름이 정말 제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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