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점 받고 쫓겨날 판에 방금 죽인 짐승의 힘을 흡수해버렸다
아르덴 왕국은 백 년째 마수에게 땅을 내어주고, 이제 성벽 안쪽만 간신히 사람의 구역으로 남았다.
왕국은 전선이 밀릴 때마다 다른 세계에서 사람을 불러낸다. 끌려온 자가 거치는 자리를 '사흘목'이라 부른다. 사흘 안에 자기 가치를 증명해 명부에 용사로 적히거나, 이름표를 뺏기고 성문 밖 짐승의 밥으로 던져지는 갈림길이다.
왕도 신전의 소환실 벽에는 앞서 불려 온 네 사람의 빈 이름판이 걸려 있다. 성벽 밖에서 뼈도 못 추린 자들의 흔적이다.
나는 검도 마법도 모르고 이 세계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 다섯 번째 소환자다.
오늘이 그 사흘목의 마지막 날, 내 목숨값을 잴 투명한 감정구슬이 탁자 위에 올랐다.
다섯 번째로 불려 온 현대인. 검도 마법도 이 세계 글자도 몰라 사흘목에서 0점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찔러 죽인 것의 힘과 감각이 고스란히 내게 남는다는 건 아직 나만 아는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