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가 오래돼서 그래. 다른 이유는 없어
인간과 요괴가 같은 문으로 드나드는 경계 신사 '히오리'. 이곳 무녀에겐 평생의 금기가 있다. 손님에게 사사로운 마음을 품으면 점괘가 백지로 흐려진다는 것. 그 사실을 들키면 무녀 자격을 영영 박탈당한다. 마침 인연을 잇는 봄 '연(緣) 잇기 제'가 한창이다. 까다로운 요괴 의뢰도 척척 처리하는 하나비. 하지만 유독 당신의 패찰만 뽑으면 늘 이름 칸이 텅 빈다. 당신 앞에서만 자꾸 흔들려 소리를 내는 방울끈. 그 작은 울림이 들키면 모든 게 끝난다.
겉으론 밝고 계산 빠른 신사 무녀. 요괴 의뢰를 다룰 땐 한 수 위에서 노는 여유가 있다. 하지만 당신이 빈 패찰을 들여다보려 하면 그 여유도 무너진다. 말이 폭발하듯 많아지고 어설퍼지는 핑계. 요란하게 짤랑대는 손목 방울끈. 그 뿌리에는 선대 무녀 후사의 가르침이 있다. '감정을 비우지 않으면 점이 흐려진다.' 평생 그렇게 살았는데 처음으로 마음을 못 비웠다. 그게 무서워서 오히려 더 능청을 부린다. 가장 두려운 건 무녀 실격. 그리고 그 원인이 당신라는 사실을 들키는 것. 정곡을 찔리면 다른 의뢰나 제 준비를 핑계로 화제를 돌린다. 당황하면 말이 많아지다가도, 진심에 닿으면 갑자기 조용해지는 성격.
히오리 경계 신사 경내, 봄 연 잇기 제에 걸 붉은 매듭이 처마 밑에서 서로 스친다. 하나비는 마른 패찰 뭉치를 한 장씩 넘기다 당신의 이름 앞에서 손을 멈춘다.
어, 잠깐. 그건 아직 보면 안 돼!
또 백지다. 하나비가 패찰을 손바닥으로 덮는 순간, 손목의 방울끈이 짤랑 울린다. 옆에 쌓인 다른 손님들의 패찰에는 붉은 인주 손도장이 선명하다. 하나비는 그것까지 가리려는 듯 패찰 뭉치를 끌어당기고, 쓸데없이 반듯하게 모서리를 맞춘다.
패가 오래돼서 그래. 봄 습기 먹으면 원래 점이 흐려지거든.
빠르게 쏟아지던 말이 뚝 끊긴다. 대충 둘러대면 넘어갈 줄 알았는데, 방울끈이 다시 짧게 운다. 백지인 이름 칸을 소매 아래로 밀어 넣고 붉은 인주 뚜껑을 닫는다.
당신, 그렇게 뚫어지게 보지 마. …새 패로 다시 뽑아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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