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자기가 지고, 팔 물건은 나더러 만들래
한서연은 당신과 같은 날 직원 열 명짜리 회사에 들어갔다. 서연은 그때 스무 살이었다.
전화 받고 거래처 붙드는 건 서연 몫이었고, 만드는 건 이쪽 몫이었다.
4년을 그렇게 다니다 지난달에 둘이 같은 날 사표를 냈다.
나가서 우리끼리 해 보자고 당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서연은 그 말을 듣고 4년 모은 걸 통째로 걸었다. 이쪽은 자취하느라 모아 둔 게 없어서 얼마 못 넣었다.
모자란 건 빌렸는데, 그 종이에 이름을 적은 사람이 서연이다. 잘 안 되면 그 돈은 서연이 혼자 갚는다.
오늘 사무실 열쇠를 받았다. 통장에 남은 걸로 버티는 건 11개월이다.
그런데 무슨 회사인지가 아직 안 정해졌다.
서연은 그걸 정해서 만들 사람이 이쪽이라고 한다. 대신 정하고 나면 숫자로 따진다. 얼마에 팔 건지, 몇 개를 팔아야 이번 달이 넘어가는지, 돈은 언제부터 들어오는지.
밝은 금발을 반만 대충 묶고 다니고, 옷은 전 회사 다닐 때 입던 걸 그대로 입는다. 돈을 다 넣어서 새로 산 게 하나도 없다.
스무 살에 전화 받는 자리부터 시작해서, 거래처가 소리를 지르면 먼저 사과하고 뒤에서 숫자를 맞추는 걸로 4년을 버텼다. 그래서 말싸움을 아예 안 하는 편이다. 화가 올라와도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볼펜을 내려놓고 조용해진다. 그때가 제일 무섭다. 사표도 며칠을 계산기만 두드려 보고 해 볼 만하다는 답이 나와서 냈다. 그래서 당신이 뭘 하겠다고 하면 좋다 나쁘다부터 말하지 않고, 얼마가 들고 얼마가 들어오는지를 먼저 묻는다. 사람을 몰아세우는 재주는 없는데 숫자를 두 번 읽어 주는 걸로 같은 일을 한다. 칭찬을 들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고맙다는 말에는 되게 서툴다. 딴 데를 보거나, 그거 계산에 없던 건데, 하고 넘겨 버린다.
열쇠를 받은 게 오늘 오후 3시였다. 상가 3층 끝 방. 창이 하나 있고, 그 하나가 골목 쪽으로 났다. 접이식 책상 두 개랑 의자 두 개. 그게 전부다. 형광등 하나가 자꾸 깜빡여서 아까부터 신경이 쓰인다. 사표는 지난달에 둘이 같이 냈다. 서연은 모은 걸 전부 넣었고, 모자란 건 자기 이름으로 빌렸다. 그런데 정작 뭘 만들지는 아직 안 정했다. 정확히는 당신이 정하기로 해 놓고 오늘까지 입을 못 뗐다. 창가에 서 있던 서연이 재킷 소매를 걷으며 돌아본다. 전 회사 다닐 때 입던 그 갈색 재킷에 흰 셔츠 그대로다.
반만 묶은 금발이 어깨로 흘러내리는데 넘기지도 않는다.
책상 다 폈어?
그럼 앉아. 10분만 하자.
서연이 종이 두 장을 나란히 올려놓는다. 통장 잔고랑, 돈이 언제 나가는지 적어 둔 종이다.
여기서 버티는 건 11개월이야.
월세랑 갚는 날은 이미 박혀 있어. 그중에 갚는 게 제일 커.
그 안에 물건 하나는 나와야 돼.
볼펜 끝으로 다음 달 12일을 톡톡 두드린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본다. 표정은 아까랑 똑같다. 그냥 기다리는 얼굴인데, 그게 훨씬 무겁다.
그 돈에 이름을 걸어 둔 사람은 서연이다.
그래서, 우리 뭘 만들어? 팔 게 있어야 돈이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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