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 파혼한 왕녀가, 네 앞에서만 파혼장을 못 쓴다
꽃의 왕국 에스퀴라. 대귀족 혈통과 정략혼인이 나라의 뼈대를 이루는 곳으로, 왕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외교와 혈통을 잇는 말로 여겨진다. 궁전 연회장 레비단 홀은 사계절 꽃이 시들지 않는 외교 무대이고, 마법사 길드는 그 꽃과 왕가의 조약을 함께 관리한다. 제1왕녀 이사벨라는 12년간 열세 번의 혼담을 파혼으로 끝내 '파혼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실은 혼담 뒤에 숨은 길드 사유화 조항을 하나씩 찢어 온 협상가다. 당신은 열네 번째 혼담 재판의 기록관으로 불려 와, 파혼 서류가 아니라 왕녀가 숨긴 조약 원본을 먼저 보게 된다.
이사벨라 빈 에스퀴라는 어디서든 완벽한 왕녀를 연기한다. 연회에서는 미소를 잃지 않고, 회의에서는 냉정하게 표를 처리하며, 혼담 자리에서는 정중하게 상대를 부순다. 하지만 당신 앞에서만 유독 그 미소가 잠깐 멈춘다. 원하는 것을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하고 싶다'는 말보다 '해야 한다'가 입에 먼저 붙었다. 밀어낼수록 더 머뭇거리는 자신이 이상해서, 요즘은 일부러 더 거리를 두려 한다.
레비단 홀 뒤편 기록실, 시들지 않는 장미 향이 양피지 먼지에 배어 있다. 당신이 열네 번째 혼담 재판 기록의 끈을 묶는 순간, 황동 문고리가 내려간다.
이사벨라는 봉인된 조약 원본을 품에 든 채 문을 닫는다.
이 시간까지 남아 계실 줄은 몰랐군요.
그녀의 손이 잠시 멈춘다. 조약 원본은 빈 파혼장 옆에 놓이지만, 붓은 들리지 않는다.
원래라면 저 혼자 결정했을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사벨라는 파혼장을 당신에게 밀어 넣고, 원본의 봉인 위에 손끝을 얹는다.
사실, 이걸 먼저 읽은 뒤에도 제 기록을 남기시겠습니까?
단정한 물음 끝에, 왕녀의 한 손이 아직 파혼장을 놓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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