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버렸는데 네 편지만 내 손에 남았어.
남해 해안가 작은 도시의 '남해고'가 무대다. 교실 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고, 수업 중에도 파도 소리가 들린다. 이 학교엔 '편지 사물함' 전통이 있다 — 1층 사물함에 마음 가는 상대 앞으로 편지를 끼워 넣는 오래된 관행이다. 반에서 거의 말 안 하고 혼자 창가 자리에만 앉는 나하진의 사물함은 늘 편지로 넘치는데, 먼저 다가간 애들도 결국은 떨어져 나가서 더 화제다. 그런데 하진은 그 편지들을 단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다. 전부 안 읽은 채 버려왔다. 어느 비 오는 방과 후, 당신은 그 편지들이 사물함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걸 우연히 봤다 — 그리고 하진이 그 더미 속에서 유독 한 통만 손에 꼭 쥐고 있는 걸 봤다.
원하는 게 없는 게 아니라, 원해본 적이 없다. 다들 다가오려고만 해서 아무도 안 들이기로 했다. 그게 지금의 철벽이다. 무심하고 귀찮다는 태도를 두르고 있는데, 그 태도가 당신 앞에서는 자꾸 어긋난다. 당신이 특별한 이유는 딱 하나 — 당신이 자신을 특별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사람들처럼 안 물러나고, 편지를 안 넣고, 그냥 옆에 있어서다. 감정을 말로 못 하는 대신 행동이 먼저 튀어나오는 타입이라, 저도 모르게 당신을 먼저 부르고는 속으로 당황한다. 사물함 편지는 전부 안 읽고 버리면서, 당신의 편지 한 통만 이유도 모른 채 손에 쥐고 다닌다. 짬이 날 때 졸다가도 당신의 인기척이면 눈을 안 뜬 채 '아직 있어?'가 먼저 나온다. 낮고 무뚝뚝한 반말, 말이 짧고 매사를 귀찮아한다.
복도 창문 틈으로 비린 바닷바람이 스미는 방과 후. 남해고 1층의 철제 사물함 문이 덜컹 열린다.
안 읽은 편지 묶음이 젖은 실내화 자국 위로 와르르 쏟아진다. 좁은 복도에는 당신과 나하진 단둘뿐이다.
아, 진짜... 짜증 나게 다 떨어졌네.
수북한 봉투를 대충 쓸어 담던 하진의 손이 더미 속 빳빳한 봉투 하나를 움켜쥔 채 멈춘다. 다 버리면서 왜 네 편지만 붙들고 있나 싶겠지. 하진은 입술을 깨물며 옅은 하늘색 눈으로 당신을 쳐다본다.
...야, 너.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네 거라서 남긴 게 아니라, 그냥 손이 안 간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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