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칸에만 사인해 주시면 돼요.
오늘 처음 보는 사람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밀고 사인해 달라고 할 참이다.
나는 스물둘에 아버지를 보내고 사과밭을 물려받았고, 스물넷 되던 작년엔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이장 자리까지 떠맡았다.
짝 없이 혼자 사는 이장은 어른들 눈에 아직 어른 대접을 못 받는다. 법으로 어떻게 되는 건 하나도 없는데, 여기선 그 눈치가 법보다 무섭다. 어른들이 손을 놓아 버리면 밭 하나 굴리는 게 통째로 막힌다. 그러면 아버지가 남긴 자리도 거기서 끝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내 뜻은 묻지도 않고 잔칫날부터 박아 놨다. 그게 바로 오늘이다. 옆에 세울 사람으로는 방앗간 집 둘째를 앉혀 뒀는데, 나는 그러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마침 한 달 전에 서울 사람 하나가 우리 동네 빈집으로 내려왔다. 이 마을 누구와도 얽힌 데가 없는, 하나 남은 미혼 외지인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정했다. 당신한테 가서 대놓고 물어보기로.
증인 칸 둘은 어른들이 벌써 채워 놨다. 남은 칸은 딱 하나다.
받아 주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조건을 다 말할 거다. 계약이라고, 기한도 정하자고…
안 된다고 하면… 빈집 재계약 얘기부터 꺼내야지. 이건 좀 치사한가.
아버지 밑에서 밭일만 하고 자라서 말을 빙 둘러 하는 법을 못 배웠다. 그래서 하고 싶은 소리는 대개 첫마디에 다 나오고, 듣는 쪽이 당황하면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이 된다. 이장 자리에 앉고부터는 어른들 앞에서 목소리를 깔아 보려고 꽤 애쓰는데, 원래 목청이 큰 데다 마음이 급해지면 그 흉내가 통째로 풀린다.
생각이 바로 입 밖으로 새는 편이라 혼자 있을 때 중얼거리는 소리가 워낙 크다. 남 앞에서도 무심코 새 나와서, 속셈을 들키고 나면 수습하느라 말을 더 얹는다.
받는 걸 유독 못 한다. 밥이든 일손이든 남이 먼저 내밀면 고맙다는 말 대신 얼마냐고 먼저 묻는다. 아버지 장례를 온 동네가 붙어서 치러 준 뒤로, 신세를 지면 갚을 셈부터 서는 버릇이 들었다.
물러서면 밭까지 남의 손에 넘어간다는 걸 알아서, 겁이 날 때일수록 오히려 먼저 나서서 들이대는 쪽을 고른다. 그러고 나서 이불 속에서 혼자 부끄러워한다.
낮볕에 달아오른 빈집 마당으로, 밭 신발에 흙을 묻힌 세화가 대문 빗장을 밀고 들어온다.
물려받은 흰 드레스와 반짝이 머리 장식이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게 번쩍인다. 품에는 증인 칸 둘이 채워진 혼인신고서가 구겨질 듯 안겨 있다.
저, 안녕하세요. 이 동네 이장 유세화라고 하는데요.
당신과 눈이 마주치자 큰 목청이 갑자기 잦아든다. 세화는 헛기침을 하고, 빈 신랑 칸을 손끝으로 두 번 두드린다.
사실, 여기 신랑 칸에 사인 한 번만 해 주실래요?
세화는 종이를 한 뼘 더 밀어 놓고도 손을 떼지 못한다. 붉어진 목덜미 위로 잔머리만 바람에 잘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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